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9:04

 

창밖을 바라보니 한 남자가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나왔습니다. 단정한 옷차림에 깔끔한 외모는 누구라도 호감이 갈만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표정을 보니 편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마음이 복잡해 보입니다. 그 사람은 한적한 공원길을 따라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여기 제시한 이 한 사람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일 수도 관심이 있을 만한 대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는 동안 순간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관찰하게 됩니다. 주의 깊게 본 것이 아닐지라도 혹시 그 사람에 대해 외모, 연령대, 입고 있는 옷의 색이나 모양 등을 물어본다면 대략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좀 더 나아가서 직업이나 종교 등이 무엇일지 물어본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견을 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제한된 정보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옷차림이나 외모에 대해 부러운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어두운 표정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수많은 사람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쳐가며 출근을 해야 하고 직장에서는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는 조직이 있고 집에 가면 가족들이 있습니다. 또한, 당장 눈앞에는 안 보여도 내가 관계를 맺은 수많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미국의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Joe Girad)는 평생 우리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 약 250명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사회학자 솔라 풀(Sola Pool)은 약 3,500명과 중요하게 알고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하루에도 스쳐 가는 수백 명의 사람, 짧게라도 대화를 나누는 수십 명의 사람 모두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존재들입니다.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 잠시라도 존재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연결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의미 있는 존재로 나에게 두셨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우주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눈앞에 나타난 현상들을 우연으로 두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올바로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입니다.

나의 전문분야는 복막 전이암을 복강경 수술로 치료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남은 수명이 수개월에 불과한 분들입니다. 내 진료실에는 오늘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내가 그들의 병을 고치는 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수십 평생 살아온 각자 삶의 짐을 잔뜩 짊어지고 내 앞에 앉아서 그 고통의 보따리를 풀어 놓습니다. 환자의 질병을 보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봐야 하고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존재를 이해할 때 비로소 사람을 대하는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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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9:03

우리 가정은 2005년 국제 선교단체의 구성원으로 허입(許入)을 받고 나서 선교 현장으로 나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훈련과정을 이수해야 했습니다. 2007년 한 해 동안은 미국 알칸소(Arkansas) 주의 통합선교연구소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머무는 1년 동안 거의 매주 빠짐없이 상담 전문가이신 사모님께 일대일 상담을 받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통합’에 대한 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남에게 내보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제일 동의하기가 어려웠던 개념은 상담 선생님의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정의가 워낙 확고하여서 상담 선생님이 제시하는 새로운 개념에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늘 역설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그러나 나의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생명에 이르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내 개념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이 된 구절들을 모두 찾아 그분께 제시하면서 과연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를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변함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고 마치 잘못된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롭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수개월 동안 지속하였는데, 어느 날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기는 했지만, 그분의 자녀는 아니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단이나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개념을 갖는 것은 통합적인 그리스인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이해는 나에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고 더 진보된 개념으로 바꾸는 작업은 마치 내 몸을 깎아 조각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으로 쪼고 망치로 두드리는 아픔이 있지 않고서는 내게 있는 군더더기가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바뀌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입니다. 겸허하게 주님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내어드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있느냐에 대한 자문을 수없이 하곤 합니다. 내가 그렇게 사람을 볼 수 있다면 어느 사람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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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9:02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삭개오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바라본 삭개오의 모습은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여겨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잃어버린 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9~10

삭개오를 바라보던 시각

사람들 예수님
세리장
부자
작은 키
죄인
이름을 아심
아브라함의 자손
잃어버린 자
구원의 대상

예수님은 삭개오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기 전부터 이미 그를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세리장이었기 때문에 그당시 유대인들이 최고의 죄인으로 여기던 그를 향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잃어버린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껍데기에 불과한 부자 세리장을 중요시하지 않고 그의 본질을 보셨으며 그가 잃어버린 자이었음을 인식시킴으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치관을 우리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평가는 하나님의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선입관이나 자신이 경험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들이 그 사람을 정확히 대변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그 사람 마음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으며 실제로는 그 당사자도 자신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잣대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중에는 잃어버린 자녀도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가 돌아온 탕자의 비유(눅15:11~32)에 나오는 둘째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소생이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결국 아버지 품에 돌아올 잠재적 그리스도인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이렇게 두 부류로만 나누어 보는 시각을 버리고 그들의 삶을 연속성을 지닌 구원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안 믿고 있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자녀요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게 될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적군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라고 우리 곁에 두신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정도가 우리를 지으실 때를 100%라고 한다면, 죄로 인해 관계가 단절되고 멀어진 정도에 따라 몇 %씩 내려가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이 100%의 상태를 회복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곧 주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망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죄인으로만 여겼던 삭개오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 보셨다는 사실은 나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단순히 삭개오의 혈통이 유대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넘어서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그의 믿음을 진실한 것으로 여기시고 사랑으로 대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게 나를 이해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갖게 해준 말씀이었습니다. 수없이 삭개오 이야기를 읽었지만, 이렇게 깨달아지기는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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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9:02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내 곁을 지나갑니다. 내가 수많은 군중 속에서 외톨이같이 홀로 떨어져 외로워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많은 사람 중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걸까? 혼자인 줄 알았는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참 놀라운 일이군!’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에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얘야! 너를 잃어버리고 나서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단다. 이제 안심하고 내 품에 안기거라. 나는 이미 너를 잘 알고 있단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어려워합니다. 무슨 철학자나 되어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우스갯소리로 가볍게 대답하고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정체성에 걸맞은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 것과 상관없이 스스로 귀한 자로 여기면 귀한 삶을 살 것이고 천하다고 여기면 천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귀한 자는 귀한 삶을 살고, 섬기는 자는 섬기는 삶을 삽니다. 가치 있는 사람은 가치 있는 삶을 특별한 사람은 특별한 삶을 사는데 스스로 천하다 여기면 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잠시 잃어버린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잘 찾아서 그 신분의 존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다른 사람이 대답해 주기는 어려운 주제입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하려 든다면 득도를 위해 수행하듯이 평생을 노력하여도 결론을 쉽게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는 길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분께 여쭙는 것입니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우리를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분이시며 우리의 머리털의 개수를 세고 계신 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맏형으로 모시고 있는 대단한 귀족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6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굳이 부인하면서 그 누려야 할 특권을 버릴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존귀한 자’라는 이해가 있어야 ‘너도 존귀하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0

진료하다 보면 비난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충분한 설명을 하였음에도 치료의 결과가 안 좋을 때 환자들은 의사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곤 합니다. 마치 자격이 없는 의사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고 나빠진 결과의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아무리 효과가 좋은 치료라도 하기가 싫어지고 조금이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을 것 같으면 먼저 몸을 사리며 치료에 소극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한 위기의 순간마다 극적으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누구에게도 판단 받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되새김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 몇백 번을 되뇌어도 좋기만 한 나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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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9:01

여기에 원리주의 이슬람교도 한 명이 서 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은 테러를 자행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아주 악한 사람이며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습조차도 사람을 긴장하게 합니다. 그 앞에서 ‘당신도 나와 똑같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이니 사랑하고 섬기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사람과 친해지다가 자신이 도리어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상종하지 않고 모른 체하고 그냥 피해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내 앞에 나타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도 분명히 하나님이 지으시고 그분의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맞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존귀하듯이 그도 존귀합니다. 다만, 그 권리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참 아버지를 모른 채 잃어버린 자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 ‘당신도 나 못지않게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미그리스도인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한다면 그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여 년 전 같이 일하던 동료가 서울의 큰 교회에서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전도할 대상을 추천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누구누구의 전도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그 친구의 전도에 대한 열심을 보면서 마음이 흐뭇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훈련이 끝나고서는 그 열정이 지속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이 전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전도하는 삶으로의 입문으로는 훌륭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기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으로 이웃을 바라보면 어찌 눈물을 안 흘리고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예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그 영혼은 나만큼이나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내 평생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남을 사랑한다, 섬긴다면서도 그 수준이 흉내에 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미운 사람도 많고 보기 싫고 피하고 싶은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그들을 존귀한 존재로 여길지가 염려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주님 만날 그 날에 완성될 사랑의 진수를 맛본다면 얼마나 어설픈 일이었는지를 알게 되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도록 노력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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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 자녀가 세상에서 고통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지금이라도 당장 그분의 품으로 부르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이 땅에 두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는 잘 헤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마치 배설물 통에 빠져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고 온몸에는 배설물이 묻어 있어 피부가 상해갑니다. 여기저기 손을 뻗치는 곳마다 만져지는 것은 온갖 더러운 것들뿐입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격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셋째 하늘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자신의 모든 조건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사단은 이런 험악한 세상을 보기 좋게 치장을 해서 살 만하다고 속삭입니다. 마치 이 땅에 모든 소망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여 중요하지 않고 죄스런 일에 매달리게 합니다. 우리의 바라야 할 본향은 분명히 하늘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볼수록 우리의 영원한 본향을 더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 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찬송가 508장 1절의 가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지금이라도 죽어 낙원에서 주님 품에 안길 것이 확실하다면 여기에 더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우리가 이 땅에서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부탁 때문일 것입니다. 천사도 흠모할 그 일을 우리가 감당해주길 원하셔서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탁이 우리 삶의 사명으로 삶에 표현되었을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나의 일대일 양육 목자 선배가 세상은 ‘똥통’과도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너무 놀랐습니다. 살만한 세상 같은데, 그 분이 너무 염세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그 선배는 그 때 이미 하나님 나라의 깊은 것을 체험하였는지 거룩함의 잣대로 죄악된 세상의 실체를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사시는 선배의 모습은 저에게 아주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이렇게 좋은 목자님을 세워주셨던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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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8:59

서른도 안된 젊은 나이에 주님 품에 안긴 예쁘고 총명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던 유망한 젊은이였는데 어려운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꺼져가는 촛불처럼 많은 여운을 남기고 우리 앞에서 떠나갔습니다. 그녀는 신앙인이 되기 전에도 성품이 고와서 또래 친구들을 많이 돕고 자처해서 상담가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녀가 하늘로 간지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친구가 그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은 가족들은 이렇게 착한 딸에게 이런 일이 왜 일어나야 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앓았던 암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일본까지 오가며 좋다는 치료를 다 받아봤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그녀는 꽃다운 나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치료에 더는 특별한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안 부모님이 누가 인도한 것도 아닌데 교회와 기도원을 찾아가서 하나님께 목놓아 부르짖으며 기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이제 만 3년이 지났는데 그녀의 남은 가족들은 모두 너무나 아름답고 열정 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하였으며 복음과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돕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깊은 기도 가운데 이 모든 일은 당신이 행하셨다는 것을 그분들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가정이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자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따님은 물론 온 가족이 이제는 영원한 나라에서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우연하게 운이 없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배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왜 내게 허락하셨는지를 빨리 깨달아야 일이 풀려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생이별을 주셔서 마음이 녹듯이 큰 슬픔에 잠겼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승리의 회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그 사람과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최선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11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 맞는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시지 않으며 주시더라도 좋은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상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냥 허무하게 가버린 것 같아도 그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하늘에서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는데 왜 데려가셨는가를 의아해하는 대신에 내게 왜 이런 일을 경험하게 하시는가를 기도하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세상은 돌아가며 하나님의 일도 성취됩니다. 도리어 데려가신 분은 상상도 못 할 놀라운 안식에 거하고 있을 것이므로 도리어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일이 내주위에서 목격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주님께 한 발짝 더 가까이 나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친해지고 싶으셔서 안달이 나신 분입니다. 나를 가까이에 두시고 대화하고 교감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뵈어야겠습니다.

학창시절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던 마취과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미소가 환자들을 얼마나 편안하게 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온유하시고 사랑이 가득한 그 선생님은 전문의를 따고 한두 해가 지났을 즈음에 교통사고로 하늘로 불림을 받으셨습니다. 이 일을 겪은 우리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 선생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너무 많이 감당하실 수 있을 텐데 그 젊은 나이에 데려가시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논리에 의하면 꼭 오래오래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분이셨는데 그렇게 빨리 데려가시니 당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겨진 가족에게는 큰 슬픔이었겠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그 선배의 소천은 많은 사람에게 큰 유익을 끼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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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8:58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듣게 되는 교훈은 대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주님을 위한 봉사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꾸중을 들어야만 했던 진짜 이유를 여기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38~42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집을 방문했다고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위대한 선지자 예수님이 누추한 집을 방문하셨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분주해질 것입니다. 급하게 지저분한 가재도구들을 정리하고 걸레질이라도 한번 할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로 지치신 예수님을 최대한 편하게 해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과연 무엇을 좋아하실지 고민하면서 음식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던 것은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몸이 서너 개라도 부족할 판에 저만 혼자 은혜 받겠다고 철없이 앉아 있는 동생을 미워할 만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잘못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의 의미는 1) 동생이 잘못하고 있다는 책망의 말 2) 그런 동생을 그냥 두고 있다는 예수님께 대한 불평 3)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과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책망은 예수님을 섬기는 일 자체가 아니라 하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을 했으며 지나치게 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일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짜증이 났다면 주님은 이런 마르다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읽고 계셨을 것입니다.

마르다 마리아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함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함“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함 좋은 편을 택함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예수님은 몇 가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마르다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섬길 수 있음에 감사했다면 그 나름대로 좋은 은혜가 임했을 것이나 분주함과 동생을 향한 불평은 예수님의 꾸지람으로 이어지게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섬기는 일이나 말씀을 듣는 일의 가치를 따지면서 말씀에 관련된 일이 더 거룩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에 따라 모든 일이 다 귀한 것인데, 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감당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외래에서 진료하는 시간에는 수술하지 않지만 가끔은 수술실 사정 때문에 진료시간임에도 수술실을 드나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한참 열중해서 수술하고 있다 보면 외래에서 환자분이 대기하고 계시다고 연락이 옵니다. 마음이 분주해지는데, 병동에서 환자가 안 좋다고 와주셔야겠다고 전갈이 오면 정신이 없어집니다. 동시에 여러 일이 겹치니 무슨 일부터 해결해야 할지를 잘 결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점심을 거르기도 합니다. 동료 의사들이 아주 여유롭게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자신이 비참해지겠지만, 지금 내가 맡은 역할에 감사하고 다른 동료들의 고유한 역할에 대한 존중함이 있다면 아름다운 연합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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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8:57

마르다는 마리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바쁜데 하나도 돕지 않는데다가 혼자만 은혜 받겠다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싱글거리며 말씀을 듣고 있으니 얼마나 얄미웠겠습니까? 언뜻 보면 마리아가 이기적이고 마르다가 더 헌신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접대하는 것을 비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귀한 일이고 접대하는 것은 하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마르다의 봉사가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었고 반대로 마리아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역할은 적절하였고 누가 틀린(wrong)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역할이 다를(different)뿐이었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주를 섬기듯 온 정성을 쏟아 감당할 때 우주적인 교회로서의 세상 전체가 올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좋은 편을 택하고 그 가운데서 은혜를 누리면 됩니다.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이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하다 보면 그룹 내에서 서로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남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어서 나처럼 생각하지 않고 나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뭔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보기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엉뚱하게 일하는 것 같이 느껴지면서 비판을 하게 됩니다. 물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다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지으신 존귀한 존재들을 우리가 비판하고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2

예수님만이 생명책을 펼치시고 심판하실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형제를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섬기기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영혼을 생각하실 때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그를 영원히 살리시려고 가장 귀한 아들을 대속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합니다. 이런 귀한 사람을 우리가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몇 번 호스피스 봉사자 교육에 가서 강의하면서 그곳에 모인 봉사자들께 부부가 행복해지는 요령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라 하더라도 수십 년을 같이 살다 보면 갈등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71억 인구를 모두 다르게 지으셨기 때문에 내 배우자도 분명히 나와는 다릅니다. 틀렸다고 판단하기 전에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 서로 싸울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 독특함이 있기 때문에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느껴지는 것이고 그래서 결혼까지 했는데 왜 나처럼 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서둘러서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나와는 다르네!’라고 말하는 지혜를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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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8:57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직업, 재물, 사회적 지위, 외모, 성격 등을 갖고 그 사람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하게 됩니다. 소수의 사람만 가진 것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인생의 목표로 삼곤 합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서로를 비교하게 만듭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좋은 자동차를 사거나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은 부러움을 만들어 내고 자신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나의 가치는 어떤 척도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가치로 평가된 나의 가치는 이 세상에 머물 동안 누리는 것으로 한시적이며 절대적이지도 않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비관하거나 불행하다고 여기며 심지어는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나보다는 훨씬 행복할 것 같은데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모두 가치 있게만 지으셨지 서로 비교하여 열등하거나 우월하게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척도들에 의해 그 급이 결정되는 다양한 가치의 사람들로 만드신 게 아니라 하나같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나의 가치 또한 타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가치로 매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올바른 나의 가치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나를 전문직에 종사하게 하신 것도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하신 것도 멋있는 외모를 갖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먼저 나의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또한 이웃을 하나님 자녀의 가치로 보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사람을 보면 패배자란 있을 수 없으며 모두가 하나같이 존귀한 주님의 자녀로 주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사랑을 누려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나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내 이웃의 최고의 가치 또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함께 사는 가족과 직장 동료를 하나님의 자녀로 존중해주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섬겨야 할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 값으로 나를 위해 지불하신 대가는 우리가 무엇을 해도 갚을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우리는 생명을 얻었고 멸망에 이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하고…’라는 토를 달고 자신이 바라는 바를 연이어 나열하는데 나의 가치를 표현하는데 ‘하나님 자녀’ 하나면 모든 것이 충분합니다. 어떤 수식어나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의 신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을 제시하면서 우리를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항상 깨어 있어서 나의 진정한 가치가 하나님 자녀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우리의 골수와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중에는 유독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쁜데 똑 부러지게 환자를 돌보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집안이 부유해서 멋진 자동차를 타고 다니거나, 잘 생긴 이성 친구가 있다면 동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리어 너무 잘 나가니까 미움을 받아서 이유도 없이 구박을 받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자신이 매긴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로 보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조금 부족함을 보여도 그 사람의 고유한 가치 때문에 더 존중하고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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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8:56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3~15

우리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는 주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종으로 표현하였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여기실 뿐 아니라 주님이 알고 계신 영원 전부터 감춰진 놀라운 비밀들을 다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친구이며 또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가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몸소 보여주신 것에 감격하며 감사드리는 동시에 또한 잃어버린 친구를 찾아 이러한 사랑으로 섬겨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겠습니다.

전공의 시절에 아버지에게 간 일부를 떼어주기로 했던 아들이 수술 전날 병원에서 도망간 일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간 절반을 떼어주기로 약속한 후 모든 검사를 다 완료하고 수술만 앞둔 시점에서 너무 두려운 나머지 줄행랑을 쳤던 것입니다. 우리 의료진들은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를 못했는데, 그 사람의 처지가 이해가 갈 만도 합니다. 멀쩡한 배를 열어서 장기 일부를 떼 내어야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위해서도 이런 작은 희생을 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예수님은 친구 삼은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드리셨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요? 친구로서 보여주신 최고 경지의 사랑을 늘 감격해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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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누구인가?2020. 3. 18. 08:55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며 빛이 사물에 비칠 때는 반드시 그림자(어두운 부분)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 자체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달은 밤하늘을 빛나게 하지만 해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달은 자체 발광하지 않는다는 것과 지구에 가려진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밤하늘을 비추는 달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수많은 별이 있지만, 달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거리를 환하게 비춰주는 일등 공신입니다.

우리는 마치 달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자체는 빛이 아니었는데 빛이신 하나님 때문에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빛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둠을 물리치는 일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빛의 자녀로서의 열매로 사는 날 동안 목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엡5:8~13

우리는 더욱 노력하여 빛 가운데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고 더 많은 빛이 우리에게서 발산될 수 있도록 주님을 향하여 더 많이 노출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는 것만으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노력은 이 땅에 있을 때만 필요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은 밤이 없으며 빛이신 하나님 때문에 온 세상에 빛의 열매가 충만해질 것입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22:5

학창시절 내가 살던 곳은 도시이긴 했지만, 사방에 논밭이 널려있는 시골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살던 마을로 들어오려면 몇십 분을 걸어들어와야 해서 늦은 밤에 손님들이 오시면 손전등을 들고 마중을 나가야만 했습니다. 한번은 멀리서 친척 형이 오셔서 마중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인데, 어둠 속에서 머리를 반짝 쳐들고 우리를 위협하는 뱀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부주의했다면 영락없이 독사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했을 텐데, 손전등 덕에 그 위험을 피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뱀이 머리를 쳐들고 달려들 듯이 죄가 가득합니다. 빛을 비추는 것만으로 죄가 물러가고 빛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빛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내가 그 빛에 속한 자녀라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보다 더 밝은 빛이 내게서 비치길 소원해 봅니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태초에 이미 지으시고 세상에 아름답게 태어난

그대는 아름다워라

지혜의 화관을 쓰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대는 아름다워라

푸짐한 열매로 세상에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포도원

그대는 아름다워라

왕이 사랑스러워 홀을 내밀 수밖에 없는

그대는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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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7

얼마 전에 어떤 분이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친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가까이 사귀어 정이 깊다는 것입니다. 상대와 친하려면 우선 가까이 있어야 하고 서로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3:24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길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며 예수님께서도 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우주 공간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계시며 내 안에 거하고 계신 분이니 어찌 그분과 친하지 않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은 친하냐 안 친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친한데 ‘얼마나 친한가’의 정도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하나님과 친한 사람은 서로가 긴밀한 교통을 합니다.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든지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함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혼자서 결정하지 않고 먼저 주님의 뜻을 겸손히 물으며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철저히 순종합니다. 범사에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과 지금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는 삶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하다 보면 결정을 해야 할 순간들이 많습니다. 더 진행할지 그만할지, 잘라야 할지 놔둘지, 어떤 방향으로 접근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연결할지, 무슨 실을 사용할지……. 아무리 경험이 많은 의사라도 수시로 이런 결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는 두렵고 떨리기도 합니다. 한번은 동료의사가 수술 중 수술부위의 지혈이 안 된다고 나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랴부랴 올라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그 의사는 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여 쓰러졌습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 어려운 순간마다 한숨같이 흘러나오는 소리는 주님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내 연약함과 무능함을 느끼는 순간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주님은 늘 바로 옆에 계셨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것은 더할 나위가 없는 은혜입니다. 로렌스 형제가 주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것처럼 삶의 터전에서 주님과의 친밀함을 더 드러낼 수 있기를 소원해봅니다.

북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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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겸
2 하나님과 친하다2020. 3. 17. 12:16

하나님을 안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단어는 ‘야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총 944군데에 쓰였는데 그 뜻이 다양합니다. 그것들은 인지하다, 경험하다, 구별하다, 배워서 알다, 어떤 사람을 알다, 관계하다, 성적 관계를 갖다,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 등입니다. 창세기 4장 1절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였다는 단어가 ‘야다’라는 것을 알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히브리인들이 누구를 안다고 표현하는 말은 이성과 논리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경험을 통해 마치 부부가 동침하듯이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을 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친숙한 관계를 맺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됨을 이해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안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해하다(understand)’라는 단어가 아니라 ‘알다(know)’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대 그리스 사람들처럼 지식과 형이상학적 본질을 따지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 관계가 형성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그분의 존재와 하시는 일을 인정해드리고 태초에 형성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가능해질 것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캠퍼스에서 우연히 알게 된 형과 몇 개월 동안 창세기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교회만 다녔지 신앙의 깊이가 거의 없었던 때였는데, 공부할수록 더 많은 궁금증이 쌓여갔습니다. 만날 때마다 꼬치꼬치 캐묻는 나의 질문에 다 대답하기는 늘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때 그 형이 나에게 알려준 말이 인상 깊었는데 ‘하나님을 이해(understand)하려 하지 말고 알아(know)가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0.999999…… 는 1과 같다고 하시길레 ‘그건 분명 1에서 조금 모자란데 어떻게 1입니까?’라고 따져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극한이니 무한이니 이런 개념을 모르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무실로 나를 부른 선생님은 나중에 알게 될 테니 지금은 그렇게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마치 부부가 동침하는 것과 같은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비록 이해하지 못한다고 부정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자세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알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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